후기 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와 빈센트 반 고흐

2020. 2. 7. 11:21섬/섬, 하나

오늘날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 

그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 보았는지, 그가 추구한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은 후기 인상주의 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살펴보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프라이가 1910년에 개최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들’ 전시회에는 고흐 · 고갱 · 세잔 외에 신인상 주의자인 쇠라, 야수 주의자인 마티스 · 드랭 · 블라맹크의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하지만 오늘날 ‘후기 인상주의’라는 말은 대체로 고흐 · 고갱 · 세잔으로 대표되는 경향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됩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을 잡아내기 위해서 화면의 균형과 질서, 형태 등의 다른 요소들을 포기했다면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19세기말 인간내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사회풍조에 영향을 받아 이를 복원함과 동시에 새로운 회화의 장을 개척하게 됩니다. 

 

사물의 본질과 물체의 입체감 등이 살아나는 회화를 그린 후기 인상주의. 색면의 구성과 색채, 균형감, 표현력 등에서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발전하여 미술상 가장 인상깊은 그림들을 남겼을 뿐 아니라 20세기 회화에 대부분 영화를 미치고 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는 양식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거의없었으며, 각 화가마다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인상주의에서 시작하여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 방식을 확립하였고, 입체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등 20세기에 발전한 회화 양식에도 여러 영향을 준것으로 확인됩니다. 

 

 


빈센트 반고흐, 열정의 화가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목사의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0년 3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때 까지 10여년동안 약 1,300점에 이르는 스케치와 850여점의 그림, 그리고 909통의 편지를 남긴 광기의 화가 입니다.

고흐는1869년 화상을 하는 백부의 주선으로 런던, 파리, 등의 화랑에 근무 하면서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박물관을 방문하여 작품 감상을 하며 성장합니다. 

 

뉘넨 시절의 고흐는 밀레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밀레의 <감자를 심는 농부와 그의아내 > 는 어딘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을 닮았습니다.

 

 

<바느질하는 스헤베닝언의 여인>, 빈센트 반 고흐 ,1881~1882년
Vincent van Gogh - Peasant Man and Woman Planting Potatoes (감자를 심는 농부와 그의 아내,1885년)
JEAN-FRANÇOIS MILLET - Les  glaneuses (이삭줍는 여인들,1875년 )  

 

1875년 1월 20일 자연주의 화가 밀레((Millet, 1814~1875)가 사망 후, 고흐는 소묘와 파스텔화의 경매에서 밀레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1876년 7년간의 점원으로 일했던 구필 상회에서 해고당하고 방황하다 부천처럼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한 빈센트 반 고흐. 

그는 1878년 벨기에 브뤼셀 복음전도학교에 부임하여 전도사로 탄광촌에서 목회활동과 함께 틈틈히 광부들을 스케치 하여 민중들의 힘든 삶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1880년 7월 고흐는 화가의 삶을 결심하게 되었고, "지독한 절망때문에 버려두었던 크레용을 다시 들기로 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생인 테오 에게 보내면서 화가로서의 출발을 알리게 됩니다. 

 

네덜란드 시기 (1880년 ~1885년), 고흐는 1881년 부모 곁으로 돌아와 농부들의 일상의 모습을 스케치 합니다.

이시기 제작한 작품들은 드로잉 작품들이 주로 들고 있으며,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농부와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덜란드 시기의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 화풍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전형적인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를 들어 이후 작품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경우 후기의 화려한 색채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인물의 형태는 이미 표현적으로 왜곡되어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느끼는 대로 그린것,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인상(impression) 이라기 보다는 안에서 밖으로 나간 표현(expression)에 가까운것을 알 수 있으며,

 

 

감자 먹는 사람들 , 빈센트 반고흐 1885년 

 

1885년 4월경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자신이 농민화가라는 생각이 틀림없다". 라는 문장이 확인됩니다. 

고흐는 자신을 농민화가라고 생각하며 농민의 일상의 삶에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대표작이 <감자먹는 사람들,1885년> 로 명암대조의 표현법인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을 사용하여 밝음과 어두움을 극대화 시켜 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시기(1886~1888), 일본 화풍의 영향을 받다.

 

1886년 1월 33살의 빈센트 반 고흐는 안트베르펜에 머물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고자 앙립순수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나, 권위적인 교육에 불만을 느끼고 파리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탕기 영감의 초상 1888년 

 

 

1886년 2월 고흐는 파리에 도착한 이후 테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는데,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며 테오의 소개로 드가, 쇠라, 시냐크, 고갱 의 화가와 교류하게 됩니다.  그에게 인상주의적 색채를 더 쓰라고 권고한 사람은 폴 고갱으로 이였으며

 

파리의 고흐는 인상주의.분할주의.상징주의 등 당대의 여러 언어를 습득하는 한편, 틈틈이 일본의 목판화를 배껴 그리곤 했습니다. 일본 목판화는 그 이국적인 색채와 형태, 그리고 구도로 인상주의 이래 파리의 화가들을 매료 시켰으며, 

테오와 함께 600점 이상의 일본판화 복제품을 수집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의 미술, 특히 우키요에에 열광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모네나 드가가 우키요에의 특색을 자신들의 화풍에 녹여 넣었던 것과 달리 빈센트는 우키요에의 영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일본의 문화를 한껏 상찬 했던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탕기영감 1887~1888)의 배경을 및 오이란의 모작을 통해 반 고흐의 일본판화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이란(게사이 에이센 모작),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아니에르의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빈센트 반 고흐,1887년 

 

 

 


 

프랑스 남부 아를 시기 (1888년) , 아를의 "노란집"에서 화가의 조합을 꿈꾸다.

 

1888년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낀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고흐가 아를에서 지내는 동안의 생활비는 동생 테오가 부담했으며, 1872년 12월 13일부터 1890년까지 쓴 821 통의 편지 가운데 668통이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요 

 

이 시기의 빈센트 반 고흐는 유동적인 색채분할, 붓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강한 필선, 단순화 되고 높은 색채를 사용해 강렬한 화풍을 보여주는 등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노란 집 (거리),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해바라기 Sunflowers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그곳에서 그는 동료화가인 폴 고갱과 함꼐 작업하기를 기대하면서 고갱을 위해 작은 집을 빌려 노란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후 해바라기 꽃을 그린 그림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때 그려진 <해바라기>의 연적 가운데 하나로 반 고흐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중요한 작품입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노란색 꽃병이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에 대해 언급하며, 

"이것은 환한 바탕으로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해바라기>는 색채, 특히 노란색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반 고흐에게 노랑은 무엇보다 희망을 의미하고 있으며, 당시 그가 느꼈던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대담하고 힘이 넘치는 붓질은 그의 내면의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반 고흐는 꽃의 섬세함을 포착하면서도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빛과 색채를 통한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으로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과 예술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흐의 방 Van Gogh’s Bedroom in Arles, 1888년

 

<고흐의 방>은 고흐가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그림으로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에서 고갱의 화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굵은 윤과가선과 분명한 형태 표현, 평평한 색과 면 표현. 이 모두가 고갱이 시도한 것으로 이미 고흐가 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흐가 고갱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으로도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인상파의 빈틈을 고갱이 영혼으로 메우려 했다면, 고흐는 마음으로 메우려 했으며 

그가 그림에 마음을 담는 첫 번째 방법으로 택한 것은 사실적인 기법의 거부로 묘사되고 있으며,

 

"일부러 부정확하게 그려서 나의 비사실적인 그림이 직접적으로 사실을 그린 것보다 더욱 진실되게 보이게 하고 싶다" 라고 자신의 그림에 대한 고흐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흐의 방>도 이런 의도가 잘 녹아져 있습니다. 창문은 열린 건지 닫힌 것인지도 잘 알수 없고, 왼쪽 의자 뒤의 벽면은 지나치게 짧이며, 침대와 공간은 지나치게 길어보이며, 고흐는 고갱에게 이것이 휴식을 표현한 것이라 했습니다. 

색채 만으로 휴식 또는 수면을 암시하려 했다지만, 하지만 위 그림에선 휴식을 찾아보긴 힘듭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휴식에 대한 그의 의도는 빗나갔지만, 그의 그림에서 불안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고흐는 결국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그려냈으며, 불안정한 흥분 상태와 초조함. 그가 택한 붉고 노란 이미지 역시 그의 불안함을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색채로 표현하고 싶었듯이 말이죠.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 Terrace of a café at night (Place du Forum,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반 고흐는 아를의 포룸 광장에 자리한 야외 카페의 밤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을 그리던 그 무렵부터 밤 중에 작업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아를르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그리기 얼마 전에는 3일 밤에 걸쳐 자신이 즐겨 찾던 카페 드라 가르 (Café de la Gare)의 실내 정경을 표현한 <아를르의 밤의 카페 The Night Café in Arles>를 완성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반 고흐는 위 그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 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이어서 그는 "기 드 모파상 (Guy de Moupassant, 1850-1893)의 소설 『벨 아미(Bel Ami)』(1885)는 대로의 밝게 빛나는 카페들과 함께 파리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이 장면은 내가 방금 그린 것과 거의 같은 거야”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고흐,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다. 

 

1888년 10월경, 테오의 요청으로 폴 고갱 반 고흐와 합류하게 되며,

당시 의욕으로 충만했던 그는 고갱과 함께 새로운 예술가들의 공동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었습니다. 

'남부의 아뜰리에'라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적극적인 작업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고갱의 오만함과 고흐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는 최악의 결합이었고, 고갱과 함께 한 시간은 고흐에게 늘 행복함을 선사하지 않았습니다. 상반된 성격과 서로 다른 예술 철학으로 인해 둘은 갈등을 계속 겪게 되었습니다.

그로 두달 후인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 둔 날 빈센트는 면도날로 고갱에게 위협했고 겁에 질린 고갱은 반 고흐를 떠나게 됩니다. 

절망 속에서 홀로 남겨진 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자르면서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프랑스 셍레미 시기 (1889~ 1890) 

 

고흐는 육체적 피로와 경제적 위협, 자신의 세계를 찾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며, 1889년 5월경 자신감의 상실과 분열의 공포로 스스로 생레미 부속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요양원의 정원과 인테리어를 주로 그렸지만, 가끔 산책을 허락받아 그곳 주변의 풍경을 그려내려 가기도 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빈센트 반 고흐, 1889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때 그린 작품 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반 고흐에게 밤 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였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아를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샛별은 그림 가운데 왼쪽의 커다란 흰 별 일것이라 확인됩니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는 구름이 소용돌이 치며 떠있으며 달과 별의 둘레에는 뿌옇게 무리가 져 있습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한 것을 알 수있습니다. 마을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닌, 부분적으로 고안되었는데, 교회 첨탑은 반 고흐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기억과 상상을 결합시켜 그렸으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는 전통적으로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로 표현되고 있으나, 반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보지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반고흐, 가셰 박사와 만나다. 

 

 

오베르-쉬르-우아즈의 교회 L'église d'Auvers-sur-Oise, 빈센트 반 고흐,1890년

 

 

프랑스 남부 아를을 떠나 생-레미 프로방스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힘든 시기를 보낸 반 고흐는 말년에 파리 외각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정착하게 됩니다. 

형을 걱정한 동생 테오는 당시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열정적인 후원자였던 정신과 의사 폴 가셰를 만나도록 권유하였고,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치료와 보호 아래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의사 가셰는 누구보다 예술가와 가까운 인물이였으며, 고흐는 그의 초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폴 가셰 박사 Le Docteur Paul Gachet (1828-1909), 빈센트 반 고흐, 1890

 

초상화 속 가셰 박사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데, 반 고흐에 의하면 가셰는 1875년 아내와 사별한 뒤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고흐는 가셰의 찌푸린 얼굴을 차분한 분위기의 옛 초상화들과 대조하고자 하였고, 1890년 6월 중순경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가셰의 슬픈 표정에서 '우리 시대의 얼굴의 표정과 열정을 읽었다' 라는 말을 남기곤 했습니다. 

 

오베르에서 보낸 두 달 동안 야외에서 고흐는 약 80점의 작품을 그려갔으며, 7월27일 가슴에 총탄을 맞고 7월 29일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삶과 죽음의 경계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 Field with Crows, 빈센트 반 고흐 1890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반 고흐의 최후작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90년 7월 오베르에서 그려졌으며, 일부 연구에 따르면 그림 속 들판은 실제로 반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곳에 돌아가 나는 그림에 착수하였다. 붓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았다 ‧‧‧ 나는 어렵지 않게 슬픔과 깊은 고독을 표현했다." 

 

이 그림에는 고흐가 느꼈던 절망감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가 기쁨에 차서 예찬하던 자연의 요소들은 이제 위협적으로 다가오게 되었고, 너무 익어버린 밀은 더이상 부드럽게 살랑거리지 않고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화염처럼 강하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하늘은 어두워졌고, 물감자국 같은 거대한 까마귀 떼는 죽음을 예고하는 것처럼 관람자를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구성도 불안정 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성은 지평선을 향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거친 세 개의 길에 의해 전경으로 쏟아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양 측면으로 난 두 길은 캔버스 밖으로 사라지고 있는 반면, 중앙에 난 길은 갑자기 끊어져 있습니다. 고흐가 느꼈던 감정 처럼 보는 이들 또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생애 동안 그의 작품에 사용된 채색이나 주제는 그가 겪은 정신적 고통과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고흐의 거칠고 강렬한 붓터치는 어쩌면 어두운 현실 속 이상을 쫓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작업에 몰두했던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세상을 떠난 뒤 20세기 많은 예술가들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수파와 추상주의, 표현주의까지 걸쳐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후기 인상주의를 상징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생전에 대중에게 외면을 당했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반고흐.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후기 인상주의 시대를 엿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